[청소년신문 요즘것들 특별호] 교복은 '옷'인가 '통제 수단'인가

아수나로

요즘것들 특별호 "청소년은 자유롭게 꾸밀 권리가 있다" 삽화 (지혜 그림)


교복은 '옷'인가 '통제 수단'인가


학교 안 청소년이 학생이라는 이유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충분한 수면, 목과 허리의 건강, 정치적 행동, 아르바이트 등등… 그리고 ‘개성을 실현할 권리’. 2021년에도 학생들은 여전히 불편한 교복을 입었고 머리모양을 마음대로 가꿀 수 없다. 심지어는 속옷과 양말까지도 학교가 개입하여 규제한다.

 

지금껏 너무도 당연하게 학생들을 통제해왔던 용의 규제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교육과 통솔을 위해, 그러니까 “다 너희를 위해서”라는 구실로 행해지는 인권침해를 언제까지 묵인해야 할까? 교사의 핀잔과 벌점 앞에서 차마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학생들은 자연히 통제되고 순응한다. 학생들에게 교복을 ‘보기 좋으라고’, ‘통솔하기 쉬우니까’ 입히고 단속한다면 그것은 이미 옷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옷을 입는 방식에 규칙을 적용하는 순간, 그것은 옷이 아닌 ‘통제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만화 ‘페르세폴리스’에서 이란 출신의 주인공 마르잔은 “바지가 충분히 긴지, 베일이 잘 씌워졌는지” 감시당하면서 두려움을 내면화하고, 자신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질문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교사나 성인 남성들은 의복에 있어 규칙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규칙과 전통의 이름 아래, 사회적 약자들은 언제까지 기본적인 생활양식마저 통제당해야 하는가. 교복이라는 의복이 얼마나 투명하게 ‘통제의 수단’이 되어 있었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도달할 수 있는 상식이었다.

 

이러한 실상이 드러나도 학교 안에 용의규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현 사회의 퇴보한 인권감수성을 교육으로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는 의미이다. 문제의식을 가진 학생들도 늘어나고 있고, 학교가 정한 규칙에 마냥 순응하는 시대도 지났다. 반대를 주장해온 지 어언 30년이 되어가는 용의규제, 이제는 좀 폐지되어야 한다.

 

 

내 취업을 교복이 해줘? 머리 짧으면 공부가 잘돼?

 

학교들은 교복이 단정하니 취업이 잘 될 거라고, 머리에 신경 쓸 일이 없으면 공부가 잘 될 거라고 말하지만 정작 응당한 증거를 갖고 있지는 않다. 서울 용산구의 모 공립 특성화고는 학생들이 모두 사복을 입고, 알록달록한 머리를 하며, 메고 싶은 가방과 신고 싶은 신발을 끌고 등교한다. 그런 학교가 특성화고들 가운데 상위권의 취업률과 진학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에도 아수나로가 만나본 학생(이었던 사람)들 중 본인의 학교도 교풍이 자유로웠으나 학업이나 취업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취업을 지향하는 직업계 고등학교들이 학생들을 설득할 때 흔히 “우리 학교가 용의규제를 잘 지키기 때문에 취업률이 높은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를 해석하면 ‘학생들의 겉모습’으로 취업률을 높이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된다. 더구나 창의성과 개성이 강조되고 있는 시대에서 본인들이 시대의 흐름을 잘 타고 있는 건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학교도 바보는 아니다. 정말 ‘빡센’ 용의규제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증거도 없는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학생들이 얌전히 교칙을 지킬만한 그럴듯한 구실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그런데 학생도 바보가 아니다. 더 이상 우리는 ‘취업을 교복이 해준다, 머리 짧으면 공부가 잘된다’와 같은 허울뿐인 변명에 속지 않을 것이다.

 

 

학생도 ‘사람다울’ 줄 아는데

 

학생이 학교에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신분을 표현하기 위해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는 애교심을 기르기 위함이라는 말도 들린다. 이런 의견들을 모아보면 결국은 ‘학생답기’ 위해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소리이다. 머리모양을 제한하는 것이나 얼굴이 깨끗해야 하는 것도 본인들이 보기에 ‘학생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으로 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학생다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학생이라는 신분의 정체성을 학교의 주관적인 재량으로 지정할 수 있는 것인지부터 의문을 던져봐야 한다. 또한, 학생들은 학생이라는 정체성만을 갖고 있지 않다. 학교는 학생들이 본인에게 큰 의미를 가져주길 바라지만, 실상은 학생들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학교를 벗어나는 순간 학생이라는 정체성은 수많은 정체성들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된다. 세상에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다. 학생 또한 하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학생답기’ 보다는 ‘사람답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언제까지 부정당해야 할까. 개성을 획일화하고 불편함을 호소하며 겉모습에 구속되게 하는 용의규제가 존재하는 이상 학생들은 사람다움을 실현할 수 없다. 결국에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학생다움’이라는 통제 아래 학생들이 학교에 순응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논리도 용의규제를 정당화할 수 없다

 

‘개성을 실현할 권리’란 곧 ‘내가 나로 있을 권리’이다. 각 지역의 학생인권조례에는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조항으로 두어 학생들의 개성을 보장하고 실현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학생인권조례가 존재하지 않는 지역은 물론 버젓이 조례가 시행되고 있는 지역들조차 이 조항이 실현되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학교들에 존재하는 용의규제가 그 주범이다.

 

또한, 용의규제 문제는 인간의 기본권인 선택권, 건강권과도 직결된다. 인간이 자신의 용모를 선택할 권리는 학교는 물론 누구도 침해하여서는 안 될 불가침의 영역이다. 전문가들은 불편하고 성능이 낮은 교복으로 인해 소화불량, 피부염 등 건강이 위협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필자는 교복을 하루 12시간 이상 착용한다. 학생들은 교복과 함께 생활하는 것과 다름 없으므로, 오랜 시간 입고 있어도 착용감이나 건강에 문제가 없어야 하지만 현재의 교복은 그저 족쇄 같을 뿐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한다. 즉,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수많은 용의규제들은 위헌이다.

 

애초에 규칙을 지키지 않고 시행되고 있는 규제를 두고 이를 위반한 학생들에게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며 불이익을 주고 있는 행태는 너무나 모순적이다. 학생인권조례 위반, 인간의 기본권 침해, 헌법 위반까지 자행하고 있는 용의규제를 어떻게 정당화하겠는가. 모든 인권은 불가침성을 가진다. 어떤 논리를 앞세우더라도 명백한 인권침해를 묵인하거나 합리화하여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반복해온 용의규제의 전통이 절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 인권침해의 악순환에 불과한다는 사실을 반성해야 한다.

 

 

학생인권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현재 용의규제 반대 운동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최종 목표가 ‘용의규제 폐지’인 것은 아니다. 용의규제는 목표로 향하는 기나긴 길 위에서 해결해야 할 하나의 과제일 뿐,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목적지는 아니다. 용의규제 반대 운동은 청소년인권운동의 시작과 거의 동시에 출발하여 약 30년간 적극적으로 실행되어 왔으나 지금껏 성공을 이뤄내지 못했다. 용의규제 반대 운동이 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용의규제 폐지가 실현된다면, 청소년인권운동에서 큰 의의를 가지게 된다.

 

또한 용의규제는 전국 학교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이 해결된다면 현대 교육 현장의 모습이 큰 변화를 맞을 것이다. 혁명에는 불씨가 필요한 법, 우리는 용의규제 폐지가 청소년인권 실현에 촉진제가 될 거라 믿는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용의규제 폐지’가 아닌 용의규제 폐지로 이루어낸 ‘청소년인권 실현’이다. 


- 레빗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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