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청소년들의 삶, 그중에서도 특히 용의와 복장은 재단되고 있다. 두발, 교복, 양말, 외투, 체육복부터 속옷의 무늬와 색깔까지 재단된다. 그 이유도 가지각색이지만 ‘생활지도를 해야 한다’, ‘학생답지 않다’라는 핑계를 제일 많이 들었다. 학생들의 주체적인 생활을 왜 지도해야 하는지, 또 학생다운 건 뭔지 수도 없이 물었지만, 아쉽게도 아직 제대로 된 답을 듣지는 못했다.
재단이란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하다’라는 뜻이다. 나는 지금 청소년들의 용의와 복장은 재단되고 있다고 자신한다. 내가 입은 바지와 치마의 길이에는 옳고 그름이 없지만, 학교는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한다. 내가 외투를 입고 안 입고에도 옳고 그름은 없지만, 학교는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한다. 바지와 치마의 길이, 외투의 착용 여부뿐만 아니라 머리의 형태와 길이, 속옷과 양말의 색깔마저 모두 재단되고 있다. 옳고 그름이 없는 것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학교는 둘 중 하나다. 옳고 그름이 없는 곳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신적인 존재거나, 그냥 어리석은 집단이거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학교에 몇 년 동안 다니면서 학교가 신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2년 전에, 내가 재학 중인 학교의 교장은 400여 명을 강당에 모아두고 ‘생명존중 교육’이라는 걸 했다. 말이 생명존중 교육이지, 내용은 생명존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생명존중에 역행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내용은 “네 몸은 부모의 것이니,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 화장하고 싶으면 부모의 허락을 받고 해라”라는 말. 언제 적 ‘신체발부 수지부모’ 사상인가. 내 몸은 학교의 것도, 부모의 것도 아닌 그냥 내 것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아직도 모르는 집단은 이상한 집단이다.
‘신체발부 수지발모’ 사상을 꺼내며 몇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용의복장규제가 문제임은 너무나 명확하다. 민주주의에 반하기 때문이다. 왜 비민주적인가 묻는다면, 과정도 비민주적이고 결과도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과정이 얼마나 비민주적인가. 대체로 학교에서 용의복장규제는 교칙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그 교칙의 결정 과정이 정말 비민주적이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있다. 의견 수렴, 개정심의, 의결까지 민주주의의 탈은 견고하다. 그러나 이 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의견 수렴은 명목상일 뿐 교칙을 적용받지도 않는 교사와 학부모가 대다수 개정안에 반대하고 이를 근거로 교칙 개정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정작 학교운영위원회 의결에 청소년은 참여할 수 없다. 비민주적인 과정에서 민주적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결과도 얼마나 비민주적인가. 다양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늦게나마 내 소개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이다. 학생자치회장 선거에 나가서 용의복장규제의 철폐를 외치다 공약과 연설문, SNS를 검열당한 피해자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근간은 다양성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 속에서 그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용의복장규제가 얼마나 다양성을 해치는가. 모두가 같은 머리 색을 가지고, 머리 길이도 제한하고, 옷의 색깔은 물론 길이마저 제한하는 학교에는 다양성도 민주주의도 없다. 용의복장규제와 다양성이 함께 있을 수 없고, 다양성과 민주주의가 함께 있을 수 없다.
용의복장규제는 청소년들의 삶을 만들고 파괴했다. 내 머리도, 옷도 모두 학교가 재단해 왔다. 내 삶에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를 학교는 내밀어왔다. 우리는 제도교육 아래에서 이 잣대에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용의복장규제는 내 머리를, 옷을, 그리고 삶을 만들었으며 파괴했다. 나는 정말로 용의복장규제가 싫다. 학교에서 온전한 나로서 존엄하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용의복장규제가 없으면 학교가 무너진다고? 고작 내가 염색 좀 한다고 학교 망할 일 없다. 나도 학교에서, 온전한 나로서 존엄하게 살아가고 싶다. 청소년도 인간답게, 온전한 나로서 존엄하게 살고 싶다.
- 안승민 (고등학생)
지금 청소년들의 삶, 그중에서도 특히 용의와 복장은 재단되고 있다. 두발, 교복, 양말, 외투, 체육복부터 속옷의 무늬와 색깔까지 재단된다. 그 이유도 가지각색이지만 ‘생활지도를 해야 한다’, ‘학생답지 않다’라는 핑계를 제일 많이 들었다. 학생들의 주체적인 생활을 왜 지도해야 하는지, 또 학생다운 건 뭔지 수도 없이 물었지만, 아쉽게도 아직 제대로 된 답을 듣지는 못했다.
재단이란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하다’라는 뜻이다. 나는 지금 청소년들의 용의와 복장은 재단되고 있다고 자신한다. 내가 입은 바지와 치마의 길이에는 옳고 그름이 없지만, 학교는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한다. 내가 외투를 입고 안 입고에도 옳고 그름은 없지만, 학교는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한다. 바지와 치마의 길이, 외투의 착용 여부뿐만 아니라 머리의 형태와 길이, 속옷과 양말의 색깔마저 모두 재단되고 있다. 옳고 그름이 없는 것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학교는 둘 중 하나다. 옳고 그름이 없는 곳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신적인 존재거나, 그냥 어리석은 집단이거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학교에 몇 년 동안 다니면서 학교가 신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2년 전에, 내가 재학 중인 학교의 교장은 400여 명을 강당에 모아두고 ‘생명존중 교육’이라는 걸 했다. 말이 생명존중 교육이지, 내용은 생명존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생명존중에 역행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내용은 “네 몸은 부모의 것이니,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 화장하고 싶으면 부모의 허락을 받고 해라”라는 말. 언제 적 ‘신체발부 수지부모’ 사상인가. 내 몸은 학교의 것도, 부모의 것도 아닌 그냥 내 것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아직도 모르는 집단은 이상한 집단이다.
‘신체발부 수지발모’ 사상을 꺼내며 몇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용의복장규제가 문제임은 너무나 명확하다. 민주주의에 반하기 때문이다. 왜 비민주적인가 묻는다면, 과정도 비민주적이고 결과도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과정이 얼마나 비민주적인가. 대체로 학교에서 용의복장규제는 교칙을 근거로 이루어진다. 그 교칙의 결정 과정이 정말 비민주적이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있다. 의견 수렴, 개정심의, 의결까지 민주주의의 탈은 견고하다. 그러나 이 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의견 수렴은 명목상일 뿐 교칙을 적용받지도 않는 교사와 학부모가 대다수 개정안에 반대하고 이를 근거로 교칙 개정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정작 학교운영위원회 의결에 청소년은 참여할 수 없다. 비민주적인 과정에서 민주적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결과도 얼마나 비민주적인가. 다양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늦게나마 내 소개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이다. 학생자치회장 선거에 나가서 용의복장규제의 철폐를 외치다 공약과 연설문, SNS를 검열당한 피해자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근간은 다양성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 속에서 그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용의복장규제가 얼마나 다양성을 해치는가. 모두가 같은 머리 색을 가지고, 머리 길이도 제한하고, 옷의 색깔은 물론 길이마저 제한하는 학교에는 다양성도 민주주의도 없다. 용의복장규제와 다양성이 함께 있을 수 없고, 다양성과 민주주의가 함께 있을 수 없다.
용의복장규제는 청소년들의 삶을 만들고 파괴했다. 내 머리도, 옷도 모두 학교가 재단해 왔다. 내 삶에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를 학교는 내밀어왔다. 우리는 제도교육 아래에서 이 잣대에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용의복장규제는 내 머리를, 옷을, 그리고 삶을 만들었으며 파괴했다. 나는 정말로 용의복장규제가 싫다. 학교에서 온전한 나로서 존엄하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용의복장규제가 없으면 학교가 무너진다고? 고작 내가 염색 좀 한다고 학교 망할 일 없다. 나도 학교에서, 온전한 나로서 존엄하게 살아가고 싶다. 청소년도 인간답게, 온전한 나로서 존엄하게 살고 싶다.
- 안승민 (고등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