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한 청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청소년은 식사가 싫다고 느꼈다. 그 행위를 귀찮거나 번거롭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고 늘 알고 먹은 맛에 잠시 질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청소년은 식사를 거부하며 부모에게 말했다. “오늘은 안 먹을래요.” 거부랄 것도 없었고, 단순한 요청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부모의 무언가를 자극했던 걸까? 어째선지 청소년의 부모는 괘씸함을 느낀 듯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윽박질렀다. “밥 또 안 먹으면 어쩐다고 했어? 가서 뭘로 맞을지 골라 와!”
그렇게 타박받을 일이었을까. 청소년은 자신이 뱉은 한마디의 어디가 부모의 핀트를 건드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청소년은 인과를 쉬이 알 수 없는 부모의 언행으로부터 약간의 부조리와 실망, 혐오와 무시 따위를 느낀 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돌을 주워 그것을 부모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돌로 저를 치세요.” 그 한마디를 들은 부모는 순간 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얼마간 청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부모는 “내가 미안하다.” 라며 청소년을 껴안았다. 청소년은 불편한 부모의 품 속에서 당황을 느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느낀 것도 같았다. 어쩐지 깊게 이해할수록 도리어 상처받는 쪽은 청소년의 쪽이 될 것만 같았다. 청소년은 부모에 대한 이해, 변호의 말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쫓아버렸다. 청소년은 줄곧 손에 쥐고 있던 돌을 방 한구석에 놓으며 생각했다. 이 이상한 감정을 함께 기억할 돌이라고.
다음 날, 청소년은 왠지 모를 기이한 감각과 함께 잠에서 깼다. 그러자 눈앞엔 어제 주웠던 돌이, 얼굴 따위를 분명히 가진 채 청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팔다리를 가지고 움직이면서. 이상할 거 없다는 듯 해맑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보내는 돌을 보며 청소년은 당황스럽게 물었다. “넌 뭐, 뭐야…?” 돌은 말했다. “난 도리야. 네가 엄마한테 날 들고 가서 치라고 했었지?” 말하는 돌이라니. 어안이 벙벙해진 청소년은 말을 흐리며 대답했다. “어… 응…. 그랬지…?” 자신을 도리라 밝힌 무언가는 계속해 말했다. “어제 네가 널 주워준 덕에 잠에서 깰 수 있었어. 네가 누군가의 품에 안겼을 때 그 이상한 감정, 나도 느꼈거든?”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청소년이 알 수 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한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하자 도리는 이어 말했다. “나는 너 같은 친구들을 초대하고 있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 그리고 도리는 짜리몽땅한 손을 내밀었다. 청소년은 혼란 속에서 망설이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도리의 손을 잡았다. 딱딱한 감촉에 서로의 체온이 맞닿자 돌군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해맑게 웃어보였다. 도리의 ‘청소년 인권말’은 곧 청소년의 언어가 되었다. 말은 조각조각 청소년 혐오적 세상에 균열을 냈다.
말 조각 하나. 이 사회는 청소년에게 하는 거짓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회는 청소년에게 하는 거짓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말이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들인데 왜 학생들은 학교 운영과 학칙 개정에 있어 교장이나 교사에 비해 동등하게 참여할 수 없는가? 학교의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는 학칙에는 학생들이 무엇을 했을 때 벌점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적혀있지만 학생들에게 권력을 남용하며 자신의 기분대로 학생들을 벌주는 교사에 대한 제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두 번째는 ‘다 너를 위해 공부하라’는 말이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이유는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즉 성공을 위해서다. 그러나 학생들의 성적은 학생들만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학생의 성적을 높여준다는 수많은 교육 업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포 마케팅을 한 결과고, 국가-학교-교사로 내려져오는 청소년을 ‘통제’하라는 명령의 수확물이다.
세 번째는 ‘너를 키워주시는 부모님께 감사하라’는 말이다. 청소년이 일할 수 없는 현 사회에서 청소년은 원가정 단위로 생존한다. 중요한 점은, 원가정의 생활 수준이 태어나는 집집마다 천차만별이며, 또한 양육자가 폭력적일 경우 그 밖의 삶을 살아갈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탈가정 청소년이 갈 수 있는 곳은 또 다른 규율로 가득한 쉼터, 혹은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지인의 집이나 길거리 뿐이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자립할 권리가 있다.
네 번째는 ‘다 어른이 돼서 하라’는 말이다. 청소년의 삶은 비청소년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중간 과정이 아니다. 청소년의 삶을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과정으로 볼 때, 청소년들이 현재 가진 욕구는 자꾸만 제한된다. 청소년들이 취미 생활을 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시간으로 치부되어 쓸모없거나 생각없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청소년의 시간은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거나 진로를 찾는 활동을 할 때만 허락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살아간다.
말 조각 둘. 감사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청소년들이 아직 비청소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뇌와 신체의 성장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성숙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청소년은 비청소년이 허용한 세계 안에서만 머무를 수 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스스로 통장을 만들 수 없으며, 일자리를 얻거나 집을 계약할 수 없다. 설사 법으로 안 된다고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으레 사람들은 청소년들이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대신 해주면 되지, 청소년이 직접 할 필요가 뭐가 있냐고 말한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비청소년에 비해 미성숙한 이유가 단지 뇌의 성장이 덜 되어서일 뿐일까?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청소년에게 금지되는 것이 많아질수록, 청소년들은 그만큼 경험하고 알게 되는 것들이 줄어든다. 스스로 집을 계약할 수 없는 사람이 부동산 관련 지식에 친숙할 리 없다. 투표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의 공약에 관심이 있기는 어렵다. 많은 청소년들이 가정이나 학교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을 부른다. 그들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의존한다. 이러한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모두의 생각 속에 비청소년이 더 많이 아는 사람,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 책임지는 사람, 그리고 결정하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시도, 더 많은 실수를 할 수 있었어야 했다. 청소년에게 미성숙하다는 진단은 청소년을 성숙하게 하기보다 때때로, 어쩌면 많은 순간 낙인이었다.
청소년은 늘 세상에 진짜로 존재하는 것들을 흉내낸 것에만 머무른다. ‘모의’ 투표, ‘예비’ 직업 체험 등은 청소년에게 매우 친숙하다. 청소년들은 청소년들끼리만 둘러싸인 곳에서 이러한 것들을 연습해 볼 뿐, 실제로 비청소년과 함께 발언하고, 결정하고, 수행할 권한을 갖지 못한다. 청소년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학교에 있어야 하는지, 대학에 가기 위해 어떤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지, 어떤 장소에 가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가 모두 비청소년들에 의해 결정된다. 청소년이 가진 권력에 비해 비청소년이 가진 권력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다.
교사들이 시험 범위를 줄여줄 때, 등교 시간을 늦춰줄 때, 또는 간식이나 학용품 등을 제공할 때 청소년들은 얼마나 납작 엎드려 감사해해야 하는가? 애초에 청소년의 의견을 반영해 결정해야 할 것을 비청소년이 독단적으로 결정하여 통지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 친구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교장 선생님을 위해 모든 학생들이 강당에 집합해 서 있어야 할 때는 얼마나 짜증이 나는가? 다 너를 위한답시고 청소년을 감시하고, 부모의 말대로 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진절머리가 나는가? 청소년들의 짜증과 불쾌함은 늘 ‘버르장머리 없는 것’, ‘철없는 것’, ‘사춘기’, ‘중2병’ 등으로 취급되었다. 불합리하고 잘못된 것에 대한 청소년의 정당한 분노도 그저 ‘한때의 반항’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소년의 분노는 정당하다.
말 조각 셋. 우리는 모두 그럴 나이에 그럴 역할을 기대받고 있다.
나이가 절대적으로 사람의 특성을 결정할 수 있을까? 나이가 어리면 무조건 미성숙하고, 보호받아야 하고, 서투르고, 아는 게 없을까? 생각보다 나이는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다. 살면서 요리라고는 손도 대본 적 없는 50대 남성과 어렸을 때부터 바쁜 양육자에게 동생에게 요리해줄 것을 강요받은 10대 여성 중 누가 요리를 잘할까? 책임감, 능력, 지식, 힘, 그 어느 것도 나이만으로는 정해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남들보다 뒤처지지는 않는지, 너무 빠르지는 않는지 페이스 조절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청소년은 늘 나이가 어려서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선거권을 거부당했다. 그런데 애초에 청소년의 선거권을 거부한 이유가 미성숙함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비청소년)여성에게 선거권이 생긴 이유는 성숙함을 증명해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여성에게 선거권이 생긴 이유는, 선거권을 주지 않고는 못견디게끔 여성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성은 힘을 가지고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는 세력이 되어 선거권을 쟁취했다. 여성이 호르몬 때문에 미성숙해서 투표하면 안된다는 둥의 주장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미성숙해서 선거권이 없다'라는 주장은 '힘이 없어서 선거권이 없다'라는 현실을 가리는 명분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시도하고 실수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까?' '어리고 미성숙한 내가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와중에 나이로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요구해도 괜찮은 걸까?' '내가 잘 모를 뿐, 사실 나이를 따져서 무조건 통제해아야 할 만큼 긴급한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골치 아프게도 나이는 연약함, 서투름, 무지함 등에 꽤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서로의 차이·의존·피해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모든 청소년이 인정받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나이만으로 단정짓지 않는 사회는 나이에 상관없이 엄격한 사회가 아니라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의지하고 용인하는 사회여야 한다. 그러니 자신이 나이가 어려도 비청소년만큼 성숙한가, 비청소년만큼 성숙하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고민하지 말자. 그보다 미성숙해 보여도 괜찮은, 성숙을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을 요구하자.
말 조각 넷. 금지로는 보호할 수 없다.
세상은 다른 사람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 수학여행에서 사고가 나면 수학여행을 금지시킨다. 학교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는 사고가 발생하면 창문에 철창을 박는다. 채팅 앱을 통해 성폭력이 발생하면 청소년이 채팅 앱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하나둘씩 못하게 만들면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까? 이는 단순하고 근본적인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청소년의 행동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점에서 유해하다.
모든 청소년의 행동은 안전하고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어야 한다. 폭력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는 방법은 폭력에 대해 말도 꺼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어떤 종류의 폭력이 있고, 폭력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어떻게 폭력을 예방할 수 있고, 폭력을 겪고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또한 어떤 폭력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실천할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특정한 정보에 청소년이 접근할 권리를 빼앗는 것은 궁극적으로 청소년을 더 무지하고 폭력에 취약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청소년의 삶은 거의 모든 행위에 대해 자신의 행위 결과를 책임져 줄,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의 허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모든 행동을 비청소년 보호자에게 허락받아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비청소년 보호자에게 저당 잡혀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해서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의 삶과 관련해서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아무리 보호자, 또는 친권자라 해도 청소년의 삶을 대신 결정할 수 없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통제는 오히려 청소년에 대한 낙인을 부추긴다. 청소년은 섹스할 권리가 있고, 사생활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을 가질 권리가 있고, 밤 10시 이후에 PC방을 갈 권리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청소년의 손발을 묶는 방식을 통해 법과 제도가 해야 할 일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사람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인력과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인식과 구조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지금, 여기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위 네 개의 말조각과 같은 가치와 신념을 가진 단체이며, 무엇보다 청소년의 권리가 '나중에 훌륭한 어른이 되서'가 아니라 지금 청소년의 직접 행동을 통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소년인권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은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모든 청소년의 인권이 보장되었을 때 비로소 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지역 곳곳에서 아수나로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엄청난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도, 동네라는 한 공간에서 청소년인권의 주장에 동의하는 청소년과 비청소년들이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 보잘 것 없고, 부족해보여도 괜찮다. 재미있고, 사소한 실천을 이어나가자. 때로는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동지가, 때로는 자신의 삶을 옭아매는 답답한 사회적 현실에 대해 함께 분노하고 머리를 맞대는 사람이 되자. 평소에 느끼는 분노와 짜증을 자신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하는 공동체로서 함께 살아남자. 각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저항과 일탈, 분노와 짜증이 한순간의 감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수나로라는 공동체에서 변화의 동력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청소년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023. 1. 29.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제31회 총회 참여자 일동
들어가는 말
한 청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청소년은 식사가 싫다고 느꼈다. 그 행위를 귀찮거나 번거롭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고 늘 알고 먹은 맛에 잠시 질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청소년은 식사를 거부하며 부모에게 말했다. “오늘은 안 먹을래요.” 거부랄 것도 없었고, 단순한 요청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부모의 무언가를 자극했던 걸까? 어째선지 청소년의 부모는 괘씸함을 느낀 듯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채 윽박질렀다. “밥 또 안 먹으면 어쩐다고 했어? 가서 뭘로 맞을지 골라 와!”
그렇게 타박받을 일이었을까. 청소년은 자신이 뱉은 한마디의 어디가 부모의 핀트를 건드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청소년은 인과를 쉬이 알 수 없는 부모의 언행으로부터 약간의 부조리와 실망, 혐오와 무시 따위를 느낀 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돌을 주워 그것을 부모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돌로 저를 치세요.” 그 한마디를 들은 부모는 순간 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얼마간 청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부모는 “내가 미안하다.” 라며 청소년을 껴안았다. 청소년은 불편한 부모의 품 속에서 당황을 느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느낀 것도 같았다. 어쩐지 깊게 이해할수록 도리어 상처받는 쪽은 청소년의 쪽이 될 것만 같았다. 청소년은 부모에 대한 이해, 변호의 말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쫓아버렸다. 청소년은 줄곧 손에 쥐고 있던 돌을 방 한구석에 놓으며 생각했다. 이 이상한 감정을 함께 기억할 돌이라고.
다음 날, 청소년은 왠지 모를 기이한 감각과 함께 잠에서 깼다. 그러자 눈앞엔 어제 주웠던 돌이, 얼굴 따위를 분명히 가진 채 청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팔다리를 가지고 움직이면서. 이상할 거 없다는 듯 해맑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보내는 돌을 보며 청소년은 당황스럽게 물었다. “넌 뭐, 뭐야…?” 돌은 말했다. “난 도리야. 네가 엄마한테 날 들고 가서 치라고 했었지?” 말하는 돌이라니. 어안이 벙벙해진 청소년은 말을 흐리며 대답했다. “어… 응…. 그랬지…?” 자신을 도리라 밝힌 무언가는 계속해 말했다. “어제 네가 널 주워준 덕에 잠에서 깰 수 있었어. 네가 누군가의 품에 안겼을 때 그 이상한 감정, 나도 느꼈거든?”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청소년이 알 수 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한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하자 도리는 이어 말했다. “나는 너 같은 친구들을 초대하고 있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 그리고 도리는 짜리몽땅한 손을 내밀었다. 청소년은 혼란 속에서 망설이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도리의 손을 잡았다. 딱딱한 감촉에 서로의 체온이 맞닿자 돌군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해맑게 웃어보였다. 도리의 ‘청소년 인권말’은 곧 청소년의 언어가 되었다. 말은 조각조각 청소년 혐오적 세상에 균열을 냈다.
말 조각 하나. 이 사회는 청소년에게 하는 거짓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회는 청소년에게 하는 거짓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말이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들인데 왜 학생들은 학교 운영과 학칙 개정에 있어 교장이나 교사에 비해 동등하게 참여할 수 없는가? 학교의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는 학칙에는 학생들이 무엇을 했을 때 벌점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적혀있지만 학생들에게 권력을 남용하며 자신의 기분대로 학생들을 벌주는 교사에 대한 제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두 번째는 ‘다 너를 위해 공부하라’는 말이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이유는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즉 성공을 위해서다. 그러나 학생들의 성적은 학생들만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학생의 성적을 높여준다는 수많은 교육 업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포 마케팅을 한 결과고, 국가-학교-교사로 내려져오는 청소년을 ‘통제’하라는 명령의 수확물이다.
세 번째는 ‘너를 키워주시는 부모님께 감사하라’는 말이다. 청소년이 일할 수 없는 현 사회에서 청소년은 원가정 단위로 생존한다. 중요한 점은, 원가정의 생활 수준이 태어나는 집집마다 천차만별이며, 또한 양육자가 폭력적일 경우 그 밖의 삶을 살아갈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탈가정 청소년이 갈 수 있는 곳은 또 다른 규율로 가득한 쉼터, 혹은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지인의 집이나 길거리 뿐이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자립할 권리가 있다.
네 번째는 ‘다 어른이 돼서 하라’는 말이다. 청소년의 삶은 비청소년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중간 과정이 아니다. 청소년의 삶을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과정으로 볼 때, 청소년들이 현재 가진 욕구는 자꾸만 제한된다. 청소년들이 취미 생활을 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시간으로 치부되어 쓸모없거나 생각없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청소년의 시간은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거나 진로를 찾는 활동을 할 때만 허락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살아간다.
말 조각 둘. 감사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청소년들이 아직 비청소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뇌와 신체의 성장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성숙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청소년은 비청소년이 허용한 세계 안에서만 머무를 수 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스스로 통장을 만들 수 없으며, 일자리를 얻거나 집을 계약할 수 없다. 설사 법으로 안 된다고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으레 사람들은 청소년들이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대신 해주면 되지, 청소년이 직접 할 필요가 뭐가 있냐고 말한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비청소년에 비해 미성숙한 이유가 단지 뇌의 성장이 덜 되어서일 뿐일까?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청소년에게 금지되는 것이 많아질수록, 청소년들은 그만큼 경험하고 알게 되는 것들이 줄어든다. 스스로 집을 계약할 수 없는 사람이 부동산 관련 지식에 친숙할 리 없다. 투표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의 공약에 관심이 있기는 어렵다. 많은 청소년들이 가정이나 학교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을 부른다. 그들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의존한다. 이러한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모두의 생각 속에 비청소년이 더 많이 아는 사람,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 책임지는 사람, 그리고 결정하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시도, 더 많은 실수를 할 수 있었어야 했다. 청소년에게 미성숙하다는 진단은 청소년을 성숙하게 하기보다 때때로, 어쩌면 많은 순간 낙인이었다.
청소년은 늘 세상에 진짜로 존재하는 것들을 흉내낸 것에만 머무른다. ‘모의’ 투표, ‘예비’ 직업 체험 등은 청소년에게 매우 친숙하다. 청소년들은 청소년들끼리만 둘러싸인 곳에서 이러한 것들을 연습해 볼 뿐, 실제로 비청소년과 함께 발언하고, 결정하고, 수행할 권한을 갖지 못한다. 청소년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학교에 있어야 하는지, 대학에 가기 위해 어떤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지, 어떤 장소에 가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가 모두 비청소년들에 의해 결정된다. 청소년이 가진 권력에 비해 비청소년이 가진 권력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다.
교사들이 시험 범위를 줄여줄 때, 등교 시간을 늦춰줄 때, 또는 간식이나 학용품 등을 제공할 때 청소년들은 얼마나 납작 엎드려 감사해해야 하는가? 애초에 청소년의 의견을 반영해 결정해야 할 것을 비청소년이 독단적으로 결정하여 통지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 친구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교장 선생님을 위해 모든 학생들이 강당에 집합해 서 있어야 할 때는 얼마나 짜증이 나는가? 다 너를 위한답시고 청소년을 감시하고, 부모의 말대로 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진절머리가 나는가? 청소년들의 짜증과 불쾌함은 늘 ‘버르장머리 없는 것’, ‘철없는 것’, ‘사춘기’, ‘중2병’ 등으로 취급되었다. 불합리하고 잘못된 것에 대한 청소년의 정당한 분노도 그저 ‘한때의 반항’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소년의 분노는 정당하다.
말 조각 셋. 우리는 모두 그럴 나이에 그럴 역할을 기대받고 있다.
나이가 절대적으로 사람의 특성을 결정할 수 있을까? 나이가 어리면 무조건 미성숙하고, 보호받아야 하고, 서투르고, 아는 게 없을까? 생각보다 나이는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다. 살면서 요리라고는 손도 대본 적 없는 50대 남성과 어렸을 때부터 바쁜 양육자에게 동생에게 요리해줄 것을 강요받은 10대 여성 중 누가 요리를 잘할까? 책임감, 능력, 지식, 힘, 그 어느 것도 나이만으로는 정해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남들보다 뒤처지지는 않는지, 너무 빠르지는 않는지 페이스 조절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청소년은 늘 나이가 어려서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선거권을 거부당했다. 그런데 애초에 청소년의 선거권을 거부한 이유가 미성숙함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비청소년)여성에게 선거권이 생긴 이유는 성숙함을 증명해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여성에게 선거권이 생긴 이유는, 선거권을 주지 않고는 못견디게끔 여성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성은 힘을 가지고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는 세력이 되어 선거권을 쟁취했다. 여성이 호르몬 때문에 미성숙해서 투표하면 안된다는 둥의 주장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미성숙해서 선거권이 없다'라는 주장은 '힘이 없어서 선거권이 없다'라는 현실을 가리는 명분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시도하고 실수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까?' '어리고 미성숙한 내가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와중에 나이로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요구해도 괜찮은 걸까?' '내가 잘 모를 뿐, 사실 나이를 따져서 무조건 통제해아야 할 만큼 긴급한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골치 아프게도 나이는 연약함, 서투름, 무지함 등에 꽤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서로의 차이·의존·피해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모든 청소년이 인정받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나이만으로 단정짓지 않는 사회는 나이에 상관없이 엄격한 사회가 아니라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의지하고 용인하는 사회여야 한다. 그러니 자신이 나이가 어려도 비청소년만큼 성숙한가, 비청소년만큼 성숙하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고민하지 말자. 그보다 미성숙해 보여도 괜찮은, 성숙을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을 요구하자.
말 조각 넷. 금지로는 보호할 수 없다.
세상은 다른 사람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 수학여행에서 사고가 나면 수학여행을 금지시킨다. 학교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는 사고가 발생하면 창문에 철창을 박는다. 채팅 앱을 통해 성폭력이 발생하면 청소년이 채팅 앱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하나둘씩 못하게 만들면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까? 이는 단순하고 근본적인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청소년의 행동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점에서 유해하다.
모든 청소년의 행동은 안전하고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어야 한다. 폭력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는 방법은 폭력에 대해 말도 꺼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어떤 종류의 폭력이 있고, 폭력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어떻게 폭력을 예방할 수 있고, 폭력을 겪고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또한 어떤 폭력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실천할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특정한 정보에 청소년이 접근할 권리를 빼앗는 것은 궁극적으로 청소년을 더 무지하고 폭력에 취약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청소년의 삶은 거의 모든 행위에 대해 자신의 행위 결과를 책임져 줄,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의 허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모든 행동을 비청소년 보호자에게 허락받아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비청소년 보호자에게 저당 잡혀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해서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의 삶과 관련해서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아무리 보호자, 또는 친권자라 해도 청소년의 삶을 대신 결정할 수 없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통제는 오히려 청소년에 대한 낙인을 부추긴다. 청소년은 섹스할 권리가 있고, 사생활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을 가질 권리가 있고, 밤 10시 이후에 PC방을 갈 권리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청소년의 손발을 묶는 방식을 통해 법과 제도가 해야 할 일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사람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인력과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인식과 구조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지금, 여기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위 네 개의 말조각과 같은 가치와 신념을 가진 단체이며, 무엇보다 청소년의 권리가 '나중에 훌륭한 어른이 되서'가 아니라 지금 청소년의 직접 행동을 통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소년인권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은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모든 청소년의 인권이 보장되었을 때 비로소 이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지역 곳곳에서 아수나로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엄청난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도, 동네라는 한 공간에서 청소년인권의 주장에 동의하는 청소년과 비청소년들이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 보잘 것 없고, 부족해보여도 괜찮다. 재미있고, 사소한 실천을 이어나가자. 때로는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동지가, 때로는 자신의 삶을 옭아매는 답답한 사회적 현실에 대해 함께 분노하고 머리를 맞대는 사람이 되자. 평소에 느끼는 분노와 짜증을 자신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하는 공동체로서 함께 살아남자. 각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저항과 일탈, 분노와 짜증이 한순간의 감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수나로라는 공동체에서 변화의 동력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청소년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023. 1. 29.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제31회 총회 참여자 일동